[교민소식] 일본군이 위안부에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 6가지
- 00.jpg(59.7K)[0]2018-01-29 10: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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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문재인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로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사실상 파기 선언을 내렸다.
그러자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발끈하며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에는 한일 위안부 문제를 들먹이며 평창올림픽에 불참하겠다고 했다가,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 따위는 엿볼 수 없는 뻔뻔한 태도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사이, 실제 피해자 할머니들은 마음과 몸에 그때의 상처를 새긴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이제 막 13살, 14살, 15살 된 곱디고운 소녀들은 우악스러운 일본군 손에 붙잡혀 지옥과 같은 삶에 내던져졌다.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할머니들. 대체 일본군들은 할머니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자료와 이토 다카시의 저서 '기억하겠습니다'를 토대로, 일본군의 만행을 낱낱이 알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여섯 분의 증언을 모아봤다.
1. 김학순 할머니 (1924~1997)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21년 길림 출생인 김학순 할머니는 1941년 양아버지가 중국가면 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가 위안소 생활을 하게 됐다.
김 할머니는 "어떤 군인은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하고, 어떤 군인은 물에 자기 성기를 닦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죽도록 맞았다. 생리를 하는 날에도 군인을 받아야 했다. 피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군의에게 받은 솜을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솜이 없을 땐 헝겊을 잘라 말아 넣기도 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영화 '귀향'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리던 김 할머니는 운 좋게도 조선인 남자의 도움을 받아 위안소를 탈출 할 수 있었다.
이후 김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전 세계 최초로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일본군의 만행이 낱낱이 알려진 날이기도 했다.
김 할머니의 용기를 치하하고 앞으로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제11차 일본군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는 매년 8월 14일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했다.
2. 김대일 할머니 (1916~2005)
(좌) 영화 '귀향', (우) 故 김대일 할머니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16년 10월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태어난 김대일 할머니는 18살에 일본군 동경 제 12사단 '종군위안부'로 중국 장춘까지 끌려갔다.
12번이라는 숫자와 일본 이름 '이시가와 스지에'를 받은 김 할머니는 그때부터 12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매일 새벽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궁성요배'를 강요당했고,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30~4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겨우 보리밥 한 덩이와 절인 무 한 조각으로 허기를 채웠다. 하루는 50명을 상대하다 쓰러지자, 일본군은 할머니에게 마취약을 먹이고 담배에 휘발유를 묻혀 자궁, 입, 코 등에 꽂았다.
영화 '귀향'
한 장교는 김 할머니를 욕보인 후 셰퍼드에게 "난 질렸다. 이제 네 차례다"라며 김 할머니를 덮치게 했다.
패전이 확실시되자 일본군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 150여명을 두 줄로 세워 뒤에서 목을 베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도 그 줄에 있었다. 정신을 잃고 차려보니 시체 속에 묻혀 있었다는 김 할머니.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김 할머니의 뒷목에는 칼로 베인 흉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의 끔찍한 만행을 알리기 위해 여러 번 증언대에 섰던 김 할머니는 끝내 일본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2005년 영면에 들었다.
3. 정옥순 할머니 (1920~)
artic.or.jp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는 1920년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났다.
14살에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 할머니는 하루에 40명 넘게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말을 안듣는다며 쇠고챙이로 몸을 지지는 일도 잦았다. 몇몇 친구들은 반항한다는 이유로 일본군 손에 붙잡혀 못판에 굴려지고 목이 베어 나갔다.
심지어 일본군들은 시신을 물에 삶아 남아있는 위안부 소녀들에게 강제로 먹이기까지했다.
1937년 정 할머니는 친구들과 도주를 시도했다가 이틀 만에 붙잡히고 만다. 그날 일본군은 바늘에 먹물을 묻혀 입안부터 가슴, 배 아래까지 문신을 새겼다.
수년이 흐른 지금도 할머니의 몸에는 그때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4. 황금주 할머니 (1922~2013)
(좌) 영화 '귀향', (우) 황금자 할머니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22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황금주 할머니는 아버지의 약값을 벌기 위해 어릴 적 부잣집 수양딸로 들어갔다.
스무살 되던 해 황 할머니는 주인집 딸을 대신해 중국 길림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시작한다.
음력 2월, 군부대 막사에 들어서자 담요 한 장과 누비 이불 한장이 지급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군인들 밥과 빨래 해주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와있던 여자가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 무조건 시키는대로 해라. 아니면 맞아죽는다"고말했다.
다음날 할머니는 그 말의 뜻을 알게됐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장교들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했다. 나중에는 30~40명씩 상대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장교들은 콘돔도 사용하지 않았고, 임신한 여성들은 누런 606호 주사를 맞고 하혈했다. 그러면 의사가 여성들의 자궁 속을 긁어낸다. 이런 상황이 서 너번 반복되면 자궁이 모두 헐어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았다.
5. 리경생 할머니(1917~2004)
Youtube '뉴스타파'
12살에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리경생 할머니는 일본군 때문에 16살에 임신이 되고 만다.
그러자 일본군은 리 할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 들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군은 '저 년을 써먹어야겠는데,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 파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92년 공개 증언에서 리 할머니는 "12살 난게 어머니 품에서 어린양 노릇하던 아이가 성노예 생활이 뭔지 아나? 그놈이 들이대니까 아이 아래가 다 파괴돼. 온통 구들바닥에 피가 쏟아지고 이래도 군인들이 쭉 들어와서 성노예 생활을 했다"며 참담했던 그 날을 이야기했다.
6. 김영숙 할머니(1927~2010)
Youtube '뉴스타파'
김영숙 할머니는 1939년 13살 나이에 중국 심양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5년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25명 중 20명이 죽어나가는 것을 눈 앞에서 봐야했다.
도망가자 잡히는 순간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매달아 놓고 때리고, 쇠꼬챙이로 아래까지 지졌다.
일본군들은 이제 막 13살 난 김 할머니에게 "일본 사람들 위대한 줄 모르면 네 간을 내먹겠다"며 칼을 들이밀었다.
공포에 질린 할머니가 도망가자 칼로 살갗을 찢고, 구둣발로 밟아 다리를 꺾어 놓았다.
할머니의 몸에는 일본군이 남긴 잔혹한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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